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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렇게 믿는다면 - 로자리아 버터필드 저, 오세원 역, 2018, [확대개정판] 『뜻밖의 회심』(아바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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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렇게 믿는다면" 

도서관 서가를 지나가다 우연히 눈길을 끄는 책이라면 일단 빌리고 보는 나다. 근데 나는 보통이라면 익숙한 길로만 다닌다. 그래서 보통의 나라면 이 책은 아마 볼 일이 없었을 책이다. 내가 신앙에서 존중하는 어떤 자매님이 추천하지 않았으면 말이다.

무려 8개월 전의 대화다.

도서관에 있나 봤는데 없어서 도서신청을 하고 받기까지 한 달여 시간을 기다려 책을 받게 되었다. 책을 건네받고 첫인상은 솔직히 '그럼 그렇지' 정도였다. 부제로 달린 '좌파 레즈비언 영문학 교수의 진솔한 고백'이란 문구 중에, 도무지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낱말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이 '간증'류 서적임을 고려할 때, '좌파,' '레즈비언,' '(종신)교수'라는 문구는 학계에 적당히 발 담가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상업적인 목적으로 배치한 단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와 대척점에 있는 단어들이기에 제목을 극적으로 부각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한창 '진지충'이 되어버린 나는 이 책이 '진솔한 고백'이기 위해서는 저런 부제를 달지 말았어야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느님이 축복하고 맺어주신 우리의 사랑의 결실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결혼식에서 똥꼬쑈를 하지는 않을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의 감상은 저자가 회심한 내용과 계기보다는 아무래도 책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지점에 묶여있었다. 이 점은 아무래도 부제가 너무 자극적이었던 탓으로 돌리고 싶다. 우선 이런 '상업화'의 혐의를 누구에게 두어야 하는지는 다소 고민되었다. 종종 등장하는 표현인 '종신 교수'는 그냥 교수보다도 몹시 대단한 무언가인 것처럼 읽히지만, 사실 테뉴어tenure를 받은 교수를 가리키는 평범한 영어단어일 뿐이기 때문이다.[각주:1] 어쩌면 저자는 자기가 테뉴어를 받은 교수였다는 것을, 즉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교수'라 불리는 모든 사람들에 속했다는 것을 전달하려던 것이었을지도 모르고, 역자가 이를 저자 의도와 내용 전달에 불필요한 정도로 부각하기 위하여 '종신'이라는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반대로 저자 자체가 테뉴어를 받은 이후에 무언가 큰돈을 땡기기 위하여(?) 연구보다는 다른 쪽으로 공력을 들이는 사람인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이 쉽사리 가시지 않은 채 책장을 넘겼고, 그래서 책에 언급된 여러 일화들은 저자가 거친 회심의 과정이었다기보다는 잘 짜인 소설의 구성으로서의 역할로서 읽혔다. 저자가 '영문학 (종신) 교수'라는 몹시 '프로(페셔널)'이기 때문에 이를 대하는 나 역시 단단히 무장하고 마음의 준비를 한 채 읽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이는 그냥 버터필드 교수의 저술과 이아무개의 독서가 아니라 속이거나 속는 프로들의 진검승부고, 나는 마치지는 못했지만 그런 프로가 되는 훈련은 꽤, 상당히, 내 생각엔 충분히 거쳤기에 이런 승부에 응할 태도로 읽었다.

전개는 예상한 데서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자신이 (그리스도교 관점에서 볼 때) 얼마나 성적으로 타락했었는지, 나중에 자신의 인생을 바꾸게 된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성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거기에 응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먼저 자세히 나온다. 버터필드는 자신의 태도가 테뉴어 받은 영문학 교수로서 갖춘 진보되고 세련된 지적인 기술을 활용하여 상대방의 헛점을 공격하고 심하게는 상대방을 웃음거리로 만들려는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더군다나 버터필드의 전공분야는 그리스도교를 비롯하여 전통적인 가치를 조롱거리로 여기는 태도가 만연 당연 자연스러운 곳이다. 나 역시 당시의 버터필드를 비슷한 시선으로 보면서 읽었다. 그러다 어느 구절에서 삶의 태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학업을 그만두던 때 연구와 관련해서 고민하던 것이지만, 그 뒤로 꽤 잊고 지냈나 보다. 버터필드 덕분에 나도 뜻밖에 회심을 하게 된 셈이다.

정말 그렇게 믿는다면

하느님이 정말 동성애자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들을 그토록 저주하는 투로 기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학계에 몸을 담았던 충분히 긴 기간 동안의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연구자들(연구논문 생산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쓴 글을 진지하게 믿지 않는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혹은 자신이 진지하게 믿지 않는 것을 논문으로 쓰며, 자신이 믿지 않는 내용을 남에게 판다. 어느 경우에나 그들은 자신의 믿음과 삶의 태도가 거의 겹치지 않는다. 누구보다 다양성을 내세우지만 자신과 다른 생각을 품은 사람을 절대 용납하지 못한다. 누구보다 '공감능력'을 요구하지만 정작 자기가 남한테 공감하는 경우는 없다. 소통과 관용 타협을 강조하지만 꽉막히고 절대 자신의 입장을 조금 내려놓고 남과 타협하는 경우가 없다.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고 외치지만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은 저능하거나 열등하거나 벌레처럼 여긴다. 여성인권을 부르짖지만 누군가가 콜걸 출신이라는 의혹을 아무렇지도 않게 제기한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다른 정치인을 지지하는 사람은 저학력, 거지라며 조롱한다.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에서는 학력이 낮고 가난한 사람들도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라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을 저학력, 저능아, 거지라고 혐오하는 사람들은 그런 세상에 발붙일 자리가 있을까?

어쩌면 자기가 하는 아름다운 말에 취해버린게 아닐까. 실행하지 않는다면 껍데기일 뿐인데 말이다. 이런 논문생산자, 강의제공자들은 좋게 말하면 수완이 좋은 비즈니스맨이다. 여기서 믿음이란 구두로나 글로 써서 '나는 ~~라고 믿는다'라고 하는 행위를 말하지 않는다. 그걸 기준으로 한다면 전두환도 정의사회구현을 믿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던 중 신앙에서도 같은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당연한 건데 그동안 신앙과 연결해서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노라고 말하지만"(60쪽) 그렇게 공개적으로 믿노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 결속과 유대를 다지는 것이 주가 되지는 말아야지. 결국 믿는다고 하는 내용을 실천으로 드러내는 지난한 과정만이 내 믿음을 남에게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삶이 기꺼워 보이고 행복하고 즐거워 보여야 남들도 이 길을 걸을까? 고민이 들게 된다.

물론 말도 중요하다. 영영 입을 다물고 지낼 것이 아니라면 무슨 말이든 하게 된다. 욕설도 할 것이고, 농담도 할 것이고. 그래도 욕설과 농담에 어떤 선이 그어지지 않을까? 예를 들면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홧김에, 흥분해서, 별 생각 없이 무슨 말이든 하겠지만 삶에 어떤 태도를 갖기로 하면 - 예를 들면 늘 감사하는 것이라던가 - 못내 부끄럽거나 나중에 후회할 말이 적어질 것이다. 기도도 신중히 하자. 기도할 생각이 들었다는 것은 이미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진 상태라는 뜻인데, 그런 상태에서 남을 저주하는 기도는 하지 말아야겠다.

책을 읽으며 든 다른 한 가지는, '멋져 보이기 위해' 혹은 의도는 좋더라도 성경을 곡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도 그런 경향이 나타난다. 그리스도교는 구닥다리고 구태의연하고 꽉막혔다고 인식되는데, 그중에서 '나는 그리스도교인이지만 이렇게 진보적이고 깨어있다'를 부각하려는 자들이 있다. 동성애 문제에서 특히 그렇다. 나는 이들의 성경 해석이야말로 단장취의인 것 같다. "예수님과 레즈비언 애인 모두를 소유해도 좋다는 그의 말은 무척 달콤하게 들렸지만, 내가 반복해서 읽고 있던 성경말씀에서는 그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주장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44쪽)

동성애자를 찾아서 불에 태워 죽여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인이라면 동성애는 죄가 아니니 괜찮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고 했을 때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 모두 크고 작은 죄를 짓고 산다. 저 사람의 죄가 더 크기 때문에 내 죄를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저 사람에게 '그것은 죄가 아니야,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이 저 사람을 위하는 마음일 수는 있어도 마치 아이를 망치는 것처럼 옳은 방식은 아니다. 별로 길지 않은 해외 유학 경험에서 보고 듣고 접하게 된 lgbt는 상당수 유행에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별로 문제 될 것이 없는 사회기 때문에 대학생을 중심으로 유행처럼 '나도 한 번~' 해보는 것이다. 동성애자일 수밖에 없도록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교회에서 이것은 다른 많은 행위처럼 죄라고 분명히 말할 때 단순한 호기심과 힙해 보이는 느낌으로 여기에 발을 들여보는 경우는 줄어들지 않을까. 어차피 교회는 실정법으로 단죄하지 못한다. 교회가 죄라고 말하는 것은 교회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사람들과 잘 지내기 위해서 교회가 교리를 뒤틀고 감추어야 한다면, 교회는 생긴 목적을 망각하여 수많은 사회집단 중 하나가 될 뿐이다.

나는 동성애자를 긍휼이 여겨서건, 아니면 뒤떨어져 보이고 싶지 않아서 건, 이런 식으로 성경을 단장취의하고 뒤틀어 해석하여 남들에게 보이는 사람은 의도에 상관없이 JMS나 신천지의 교주들과 별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이 역시 몇 달은 된 대화다.

다 읽고 추천해준 사람에게 추천사 한마디를 부탁했다. 과정은 달라도 다 읽고 든 느낌은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신앙이 달콤한 말만 해주는 것 같은 사람, 신앙이 삶에 별다른 변화를 주지 않는 사람, 관성으로 교회에 나가는 사람, 신앙과 세상의 유행을 모두 쥐려는 사람들에게 읽기를 권한다.

  1. 테뉴어는 한국에서는 '정년제' 혹은 '정년 트랙' 교수를 말한다. 만 65세까지 대학에서 교수로서 근무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조금 다른데, tenure는 정해진 나이가 아니라 정말 죽기 직전까지 본인이 스스로 그만두거나 명백한 잘못을 저질러 규정에 의해 해임되기까지 근무할 수 있다. 연방대법원 판사들은 테뉴어를 받기 때문에  죽거나 스스로 사임하거나 탄핵되기 전까지 연방대법원판사직을 유지하기 때문에 각 대통령이 누구를 임명하는지가 미국 정치에서  남다른 관심을 받는다. 덜 알려졌지만 테뉴어를 받은 교수들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테뉴어는 한국에서의 '정년 보장'과는 사뭇 다른 의미가 있고, 이를 특별히 '종신 교수'라고 표현하는 것이 내용상 오류는 아니다. 오히려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외재적으로 맥락을 고려한다면 개신교 독자들에게 책을 잘 팔기 위한 상업적인 목적의 자극적 술책이 아닐까 의심이 된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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