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에서는 조선 초의 상남자 혹은 망나니 세조의 일화를 소개해 볼까 한다. 두 차례 군사정변을 일으켜 기어이 왕이 된 태종 이방원은 국왕의 정통성과 후계구도의 안정을 위해 장자세습의 원칙을 세우지만, 망나니였던 양녕대군을 폐하고 3남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그냥 죽고 물려주기에는 불안했는지 살아서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서도 병권만큼은 자기가 갖고 버티기까지 했다. 세종은 다행히 장자 문종에게 물려주고 문종 역시 어리지만 장자인 단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지만 야심 찬 삼촌 세조는 어린 조카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자기가 왕이 된다. '관상가 양반! 어디 내가 왕이 될 상인가?'라는 명대사를 남긴 영화 '관상'이 바로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세조의 패악질 희생자는 어린 조카 단종과 친동생 안평대군, 금성대군뿐은 아니다. 세조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나 사적인 자리에서나 성질을 자주 부렸다. 즉위 1년 8월의 일이다. 육조직계제를 실시할지 논의하는 회의에서 예조판서이던 하위지가 주나라(周)의 제도를 보면 총재가 백관을 통솔하지 국왕이 직접 하지 않는다고 반대하자, 세조는 "누가 이런 개소리를(迂闊) 하였는가?" 격분하며 하위지의 모자를 벗기고 경비병에게 머리채를 끌고가서 곤장을 치게 한다. 화가 덜 풀렸는지 세조는 하위지를 이튿날 죽여서 저자에 목을 걸어두라고 하지만 주변에서 말려 하위지는 일단 목숨은 건진다. 예조판서는 정2품으로 장관이다. 그런 수모를 당했으니 이듬해 사육신이 되는 것도 이해가 갈 정도다.
어쨌든 세조의 급발진은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런데 웃기게도 많은 경우 세조의 발작버튼은 불교였다. 세조는 스스로 "나는 부처를 좋아하는 임금이다" (我好佛之主)라고 떠들고 다녔기 때문이다. 왕자시절에도 세조의 불심은 남들보다 더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세조는 훈민정음으로 불경해설서인 석보상절을 지어 어머니 제단에 바칠 정도였다. 부처의 가르침은 살생을 피하라는 것이지만 권력을 쥐려면 어쩌겠는가? 살생으로 얼룩진 즉위 직후부터 세조는 대장경을 비롯한 불경 간행에 열중한다.
그런 천상불자(佛子) 상(上)남자 세조가 종친과 공신을 궁으로 불러서 거하게 한잔을 하며 신하들에게 춤을 추게 하며 놀고 있을 때였다. 같이 한잔 하던 정인지가 문득 세조 앞으로 오더니 "법화경하고 다른 불경 수백 벌 인쇄하고 대장경도 오십 벌 인쇄했는데 또 석보도 인쇄하라 하니 좀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한 말씀 올린다. 화가 난 세조는 즉시 술자리를 끝내고 사람들을 돌려보낸다. 정인지 정도 네임드가 아니었으면 정인지도 그날 부처님 만나러 갔을 것이다. 실제로 한 말씀 잘못 올렸다가 부처님 만나러 간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실록을 읽다 보면 세조는 종친, 공신, 재상을 불러다 술자리를 마시는 일이 많다. 궁에서도 마시고 사냥터에 가서도 마시고 여기저기서 많이도 마셨다. 세조 6년 꽃피는 춘사월에 경회루에서 활쏘기를 하며 종친, 공신들과 한잔하던 때였다. 세조가 취한 것 같자 양녕대군이 에둘러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세조는 한마디로 대답한다. "나는 불교를 좋아하는 임금입니다." 말로는 거의 생불이다. 그런데 자기를 왕으로 밀어준 큰삼촌 양녕대군 정도 되는 사람이 아니면 술자리의 세조에게 불교에 대해 말을 꺼내는 일은 말했듯 자살행위다.
세조 7년 어느 겨울날도 세조는 종친, 재상을 불러다 술을 마셨다. 그리고는 같이 후원을 걷다가 신하들에게 병법, 장자, 노자, 다스리는 법 등을 논해보라고 했다. 참석자 중 하나인 성균관 대사성인 서강(徐岡)이 논하다가 세조가 묻지도 않은 불교가 옳은지 그른지, 불교로 마음을 다스리는게 말이 되는지까지 따지는 것이 아닌가! 세조가 서강의 의중을 떠보려고 벌주랍시고 술을 두어 잔 더 먹이고 "취했냐?"라고 물었다. 취해서 한 실수라면 '살려는 드릴게'라는 말이었다. 술자리에서 안취했다고 말하면 보통 끝이 안 좋다. 애석하게도 서강은 "안 취했습니다!"라고 답했다. 서강의 죽음이 결정되는 세조의 한마디, "저새끼(此物) 하위지 같은 놈이구나." 하위지는 오 년 전에 이미 죽였는데 말이다.
그날은 이미 밤이 늦어서 다들 퇴근하고 없었다. 야밤에 화가 난 세조는 환관에게 서강을 끌고가 서른 대 패라고 한 뒤 사람을 시켜 "왜 그렇게 싸가지가 없게 굴었냐?"고 묻는다. 서강이 "저는 평소에도 집에서 불경을 열심히 읽습니다."라고 답하자 또 묻지도 않은 답을 한다며 열 대를 더 패게 한다. 마흔 대를 맞은 서강은 후원 밖에 묶인 채 겨울밤을 지샌다.
이튿날 세조는 성삼문, 하위지같은 불손한 놈들은 꼭 말끝마다 자기들이 간쟁을 하는 것이라 핑계를 대더니 끝내 반란을 일으켰다며 서강을 죽이거나 제주도에 노비로 보낼 셈이라고 한다. 다시 이듣날 사냥에 나간 세조는 "내가 서강 아직 안 죽인 것은 세 번은 생각해보려고 참은 거야, 니들 내 맘 알지?" 하고는 돌아오는 길에 성균관에 들러 공자에게 인사를 드린다. 성균관 총책임자인 성균관 대사성 서강은 아마 후원에 사흘째 묶여있는데 말이다. 세조의 삼세번 생각은 서강을 죽이는 것이었다. 죄목은 "묻지도 않았는데 불교를 배척한 것"이었다. 서강의 아내가 서강이 독자이니 살려달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과거에 급제한 집현전 출신 서강의 끝은 목 졸라 죽이는 교형(絞刑)이었다. 세조 7년 1월의 겨울이었다.
흔히 역사를 읽는 이유는 교훈을 얻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니 오늘도 교훈을 찾지 않을 수 없겠다. 첫째로 누가 취했냐고 물으면 취했다고 답하자. 취해 보이니까 취했냐고 묻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너 모솔임? 하고 묻는 것도 모쏠 같으니까 그렇게 묻는 것이다) 그리고 취했다고 하면 봐줄지도 모른다. 둘째로 술자리에선 재밌는 이야기만 하자. TPO라고 한다. 술자리는 간언을 하는 자리는 아닌 것 같다. 셋째로 누군가가 아무리 좋은 말을 하고 그런 말이 담긴 책을 쓴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그런 삶을 살고 있으리라 믿지는 말자. 세조는 당대의 뛰어난 불교이론가이자 불자였다. 논어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예전에 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행실도 그러하리라 믿었는데 이제 나는 남의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의 행실도 그러한지 살핀다." 말만 번지르한 사람을 두고 한 말이다.
*참고자료
하위지 관련: 세조실록 1년 8월 9일
정인지 관련: 세조실록 4년 2월 12일
양녕대군 관련: 세조실록 6년 4월 26일
서강 관련: 세조실록 7년 1월 21일, 1월 22일, 1월 23일, 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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