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이다. 우리 집에는 제사가 좀 많다. 그 사정을 아는 친구들은 예전부터 '너는 장가가기 글렀다'며 놀리곤 했다. 제사는 점점 지내지 않는 세태고 나는 간소하게나마 지내는 게 도리라고 생각하니 말이다. 인터넷 썰이라고 도는 이야기들을 봐도 제사 때문에 불화가 생긴다. 심하면 법정 다툼까지 벌어진다. 자손이 화목하고 번창하길 바라실 조상님들 입장에선 속이 터질 일이 아닐까?
그런데 유교보이 유교걸의 나라였던 조선시대에도 제사로 불화가 생겨서 재판까지 간 일이 있었다. 무려 임금님이 직접 판결을 내려야 했던 큰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제사 관련 재판과는 큰 차이가 있다! 오늘날은 서로 자기가 지내지 않겠다고 싸운다면, 조선시대에는 서로 자기가 지내겠다고 다퉜다는 점이다. 재판의 당사자도 무려 형수와 시동생이다. 제사 지내는 집 며느리는 되지 않으려는 것이 요새 풍속이니 자기가 돌아가신 시아버지 제사를 모셔야 한다며 시동생과 법정에서 다툰 송씨 부인은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미친 여자일지도 모른다. 송여사께서는 첫 재판에서 지고 무려 14년 뒤에도 다시 소송을 걸고야 만다. 우선 가계도를 보자.
다툼의 불씨를 만들고 죽은 김연지는 조선 태종연간 좌랑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지평, 정랑, 대호군, 각조 참의, 전라도관찰사, 개성유수, 공조참판, 평안도관찰사, 호조참판, 대사헌, 이조참판, 경기도관찰사를 두루 거치고 사건 당시인 성종 연간에는 중추부지사와 판한성부사를 지냈다. 중추부(中樞府)는 당상관 중 별다른 보직이 없는 사람들을 소속시킨 좋게 말하면 자문기구, 달리 말하면 땡보 관청인데, 지사(知事)는 여기에 속한 정2품 벼슬이다.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는 조선 초 한성부의 으뜸 벼슬로, 즉 서울시장으로, 품계가 무려 정2품인 고위직이다. 오늘날 장관에 해당하는 이호예병형공 육조 판서가 정2품이니 김연지가 얼마나 높은 직위를 역임했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승승장구한 김연지의 큰아들 김익수는 함경북도 부령의 부사를 맡던 중 세조 13년 1467년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사한다. 포대기에 싸인 핏덩이 아들 김덕형과 고소왕 여장부 부인 송씨를 뒤로 한 채 말이다.
문제는 김연지가 장남 김익수와 장손 김덕흥이 아닌 3남 김견수에게 자신과 자신의 장인어른 제사까지 다 모시도록 한데서 벌어졌다. 단순히 노년에 말로 유언한 것이 아니라 정신이 온전할 때 아들, 사위와 논의하여 증인도 갖추고 자필로 문권을 만들어 김견수에게 제사를 모시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종법(宗法)에 따르면 집안의 적장자는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적자면서 장자인 아들에게 집안의 대가 이어져야 하고 조선 후기로 갈수록 종법은 철저히 지켜진다. 조선 후기의 큰 논쟁이었던 예송논쟁은 바로 인조-소현세자-효종의 종법적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를 두고 벌어진 논쟁이었을 정도다. 당시 경국대전에도 이미 '立嫡子違法'이라 하여 적자를 세우기를 법에 어긋나게 한 죄가 있으며, '제사 지낼 아들을 바꿀 때에는 관청에 신고하여 국왕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법'도 있었다. 송씨 부인은 이 점을 근거로 성종 6년 소송을 걸었으나 예조에서 시아버지 김연지의 편을 들어주고 성종이 그대로 따름으로써 패소한다.
1475년 예조의 논리는 이렇다. 첫째, 김연지가 직접 증인도 세워서 자필로 문권을 만들었는데 이는 노망이 나서 한 것이 아니라 제정신으로 한 것이기에 뜻을 존중해야 한다. 둘째, 국왕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법은 김연지가 문권을 만든 다음에 생긴 법이라 여기에 적용하기 어렵다(!) 셋째, 시아버지의 뜻도 헤아리지 않고 며느리가 소송을 거는 것이 아녀자의 도리에 어긋나고 강상을 해친다. 이렇게 첫 소송에서 패소한 송씨 부인은 시아버지 김연지가 죽자 이번에는 시동생 김견수를 상대로 소송을 건다.
지금까지의 사건들을 시간순으로 정리해보자.
1. 김연지의 차남 김경수가 아들 둘을 낳고 요절
2. 김연지의 장남 김익수가 아들 김덕흥을 낳음
3. a 김연지가 김익수는 제사지내기에 문제가 있다며 3남 김견수가 집안의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문권을 만듦
3. b 김익수가 이시애의 난에서 전사함 (1467) (성종 6년 실록에는 김익수가 죽기 전에 문권을 만든 것으로 나오지만, 성종 20년 실록에 인용된 송씨 부인의 소장에 따르면 김익수가 죽은 뒤 김덕흥이 어리기 때문에 문권을 만든 것으로 나온다)
3. c '제사 지낼 아들을 바꿀 때에는 관청에 신고하여 국왕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법' (실록에 따르면 이 법은 3.a 보다 뒤에 만들어졌는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음)
4. 경국대전 완성 (1468) - '立嫡子違法'
5. 송씨 부인의 첫 번째 소송 (1475) - 송씨 부인 패소
6. 김연지 사망
7. 송씨 부인의 두 번째 소송(1489)
두 번째 소송에서도 예조는 같은 논리를 펴며 이미 결정된 사안을 다시 따지는 것은 '매우 불가(甚不可)'하니 논의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을 낸다. 그러나 성종은 이번에는 영돈녕 이상과 의정부에서 논의하여 보고하라는 명을 내린다. 영돈녕 이상과 의정부의 의견은 예조와 같았다. 육조, 한성부, 대간도 논의하라 하자 이들은 맏이가 제사를 잇는 것이 고금의 공통된 법이며 아들이 없으면 손자가 이어야 하는 것이 마땅
하다는 의견을 낸다. 덧붙여 지난번 판단이 잘못되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마는 것이 옳은 일인데 예조는 자주 고치면 헷갈리므로 다시 논의하지 말자고 하니 '정말로 불가(固爲不可)'하다고 비판한다.
성종은 이번에는 송씨 부인의 편을 들어줄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맏이가 제사를 지내는 것이 고금의 공통된 의리며 이제 김덕흥이 장성했으니 이전까지 김견수가 지내던 제사를 김덕흥이 지내도록 바로잡는 것이 어떻겠냐는 전교를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늙은 재상들이 다시 거세게 반대한다. 며느리가 시아비에게 소송을 하는 것을 들어주면 앞으로 아들 며느리들이 아버지를 뜻을 가볍게 여겨 강상이 무너지리라는 것이다. 원론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이들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https://theinsideout.tistory.com/entry/003-%EC%97%B0%EC%9E%AC%EB%AC%BC-%EC%9D%B8%EB%AC%B8%ED%95%99-%EC%97%B0%EA%B5%AC%EC%9E%90%EA%B0%80-%EC%9E%90%EA%B8%B0%EC%97%90%EA%B2%8C-%EC%A7%84%EC%8B%A4%ED%95%98%EB%8B%A4%EB%9D%BC%EB%8A%94-%EA%B2%83-02 참조).
이들의 본심은 아마 다른 데 있지 않았을까? 그 단서는 이어지는 이들의 논의에서 엿볼 수 있다.
"유독 김연지만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 이와 같은 유(類)가 또한 많이 있으므로 만일 개정(改正)하는 단서를 열어놓는다면, (...) [다른] 가문의 자손들도 또한 반드시 봉기하여 소청하게 될 것입니다. 어찌 하나하나 뒤따라 고칠 수 있겠습니까?"
즉 김연지 같은 사례가 허다한데 유독 송씨 부인만 이를 문제 삼아 소송을 걸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허다한 사례 중에는 공신 조말생의 가문도 있었다. 아마 자기네들 집안에서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조선사를 좀 읽어봤을 사람들 눈에는 낯익은 이름들이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송씨 부인의 소송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한 사람은 아래 링크에서 직접 찾아보길 바란다.
*참고자료
성종실록 6년 2월 3일 7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ia_10602003_007)
성종실록 20년 10월 25일 1번째 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ia_12010025_001)
유교국가에서 불자로 살아남기 불교 군주편 태조 이성계 - 너 이색보다 유교 잘함? (3) | 2022.12.30 |
---|---|
말로는 거의 생불(生佛), 상남자와 망나니 사이 조선의 호불지주(好佛之主) 불교를 좋아하는 수양대군 세조 (2) | 2022.12.27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