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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도 돌아가기 어렵네 慕難返 - 思吾王考荷堂翁詩

이렇게 지어 보았다 如是我習作

by 內幕 2024. 4. 4.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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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之爲物自妙冊 삶이란 것은 신묘한 이야기 책

可堪七情具周編 칠정[각주:1]의 일 모두 담아 엮었지.

君莫流連喜樂節 기쁘고 즐거운 절節[각주:2]을 냅다 쫓지[각주:3] 마시게

紙張雖輕慕難返 종잇장 가볍다 한들 그리워도 돌아가기 어렵다네.


삶이란 오묘해서 기쁘고 즐겁고 괴롭고 슬픈 일이 모두 담겨 있다. 빗대자면 다양한 장절로 엮인 책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기쁠 때는 신이 나서, 고될 때는 피하고 싶어 시간을 재촉한다. 지나고 보면 그리울 일들을 그때를 당해서는 미처 찬찬히 살피지 못하는 것이다. 종이로 된 책장은 가벼워 이리 넘긴 뒤에도 다시 저리 넘길 수 있지만, 우리네 삶이라는 책은 신묘하여 한 장 넘어가면 돌이키지 못한다. 별 도리 없이 그리워만 할 뿐. 어느 겨울 방학 늦저녁에 눈 내리는 안채 뜰팡 아래 벌거벗고 엎드려뻗치던 기억이 떠올라 웃었다. 글을 못 외우던 밤이었을까 밤중에 당숙과 다투던 밤이었을까. 할아버지가 성을 내며 그런 벌을 주시니 증조할머니가 내 새끼 불알 떨어진다며 당장 들어오게 하라고 소리치셨다. 팔순 넘은 노인이 환갑 지난 노인한테 지 애미 말도 안 들어! 했던 기억이다.


몇 해 전 유학길이 정해지고 인사를 드리던 때, 할아버지는 공부를 꼭 외국 나가서 해야 하느냐 서울에는 대학이 없느냐 하셨다. 이어 내 살아 생전에 너를 다시 볼 수 있겠냐고 하셨다. 왜 못 보시겠어요? 하고 능청스레 답했지만 속으로는 나도 알고 있었다. 유학 길은 짧아도 사오 년 길면 몇 해가 걸릴지 모르고, 할아버지는 날로 늙고 힘없어지고 계시다는 걸 말이다.

그러다 연구에 회의를 느꼈고 내 삶에 다시 나타난 나의 사랑하는 그녀가 "진짜로 때려치고와도 이해해 줄게"라고 해주니 나는 큰 결단을 내려 중도이폐中道而廢 하고 귀국했다. 작년은 말 그대로 일사천리一瀉千里였다. 재작년 성탄대축일 교중미사 복사를 서고 그날 밤 비행기로 귀국하여 서울에 들러 짐을 정리하고 부산에 함께 다녀온 뒤 그다음 월요일부터 친구 집에 얹혀살며 봄내에서 출근했다. 그 뒤 오월 하순에 결혼하기까지 금요일에 퇴근하면 열차로 상경하여 서울 처가에 묵으며 결혼준비를 했다.

생전에 다시 볼 수나 있겠냐던 할아버지를 모시고 우리 집안에 중요한 연고가 있는 장소에서 혼례를 올렸다.

혼례를 시월에 하려고 했으면 이렇게 모시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왕 할거 그냥 봄에 빨리 하는게 어떠냐는 한 마디를 유교민주주의 이론가에게 전했다가 일사천리의 물꼬가 터지게 되었으니 이는 내 아버지의 덕이다.
MM에게 축사를 부탁했다. 특별히 마르코의 복음서 10장 8~9절을 인용해 달라고 했다. 결혼반지에 새긴 말씀이기도 하고, 그의 이름이 마르코(Mark)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혼하고 한 달 무렵에 아이가 생긴걸 알았다. 가을 경 아들인 걸 알게 되었다. 그 무렵부터 거동이 힘들어 요양병원에서 지내시던 할아버지는 아들인지 딸인지는 나와 봐야 안다고 하셨다. 금초, 명절, 시제사, 제사 등 한국에 와 있으니 집으로 자주 가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콩알만한 봄동이 초음파 영상을 보여드렸다. 이게 증손자 불알이라고 보여드려도 허허 웃기만 하셨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지난 한 해와 올 초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렸다고 여기고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그녀와도 모든 일에 감사하다고, 하느님이 뭐가 이쁘다고 우리를 이렇게 잘 봐주시는지 궁금해 할 정도였다. 지금은 막간이고, 삶의 다음 장章을 준비하는 시기라고 생각하면서, 일이 너무 잘 풀리기에 다음 장을 조금 더 일찍 열어볼까 우유 짜는 처녀처럼 몽상마저 시작했다. 제선왕에게 크게 하고자 하는 바(大欲)가 있었듯 나도 하려는 바를 세웠다. 잘 풀리다 보니 자신감도 넘쳐 우백정 계백정 운운에 이르렀다. 나의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장인이 멋있는 사람이며 그들이 이룬 것이 큰 성취, 소 잡은 성취지, 사람들이 내게 집요하게 권하는 일은 닭 잡는 일이라고 말이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은 없다.) 무엇을 성취했기에 소 잡는 성취라고 내가 부르는지 궁금해할 할아버지가 이루신 바에 대해서는 정리해서 쓸 날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너무 잘 풀려서 시간을 재촉했다.

그러던 어느 주말 아침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원래 달포 뒤에 증손자 백일상을 집에서 차리고 뵙기로 되어있었다. 장례를 치르러 내려가기 전 눈물을 흘리며 씻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좌우 보지 않고 재촉하던 시간은 할아버지께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던 것이다. 흥興이 일어 씻으며 네 구의 얼개를 갖추고 내려가는 길 운전하며 지었다. 늘 그렇듯 옛 학우 孫兄이 고쳐주었다. 그러곤 "節哀,順變。"이라며 화답시를 보냈다.

和李君碩熙兄台 《妙冊慕難返》

浮生倥傯冊連篇 책장에 책장을 잇고 엮은 듯 덧없는 삶 바쁜데

經史子集竟周全 경사자집 끝내 모두 갖추었네

借問何處喜樂節 어느 구절이 재미있소 조심스레 물으니

君指月旁繁星天 그대는 달빛 언저리 하늘 가득 뭇 별 가리킨다네

할아버지는 증손자를 사진과 영상으로만 보시고 生面하지는 못하셨다.

부고를 듣고 허둥지둥 떠났다. 돌아오니 꽃이 피어 있었다.

할아버지 유업遺業은 내 잘 잇고 마칠 테니, 굽어보며 편히 쉬시길.

  1. 맹자께서 우리 감정을 일곱 가지로 말씀하셨다. 세상만사에 대응하는 우리 감정이 모두 이 안에 해당한다는 뜻으로 칠정이라 하였다 [본문으로]
  2. 이 글자는 번역을 할 수 없다. 삶의 한 때(時節)이자 이를 빗댄 책의 장절章節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3. 맹자 양혜왕 하 4장에 '물길을 따라 내려가 돌아오길 잊은 것을 류流, 물길을 따라 올라가 돌아오길 잊은 것을 연連이라 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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