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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널 위해서 그래'라는 가스라이팅 - 오늘의 행복과 미래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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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이다. 인터넷상에서는 오늘이 차이니즈 뉴 이어 Chinese New Year 인지 루나 뉴 이어 Lunar New Year 인지 코리안 뉴 이어 Korean New Year 인지 그냥 설날 Seollal 인지 춘절 스프링 페스티벌인지 두고 열등감 말고 남은 게 없는 빈곤한 쥐떼들이 한창 사단을 일으키고 있다. 반대로 현실의 거리는 썰렁하다. 거리의 상점과 식당이 온통 문을 닫고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만 문을 열었다. 스타벅스에 들어가니 머리통이 한 줌 주먹만 한 애기들이 앉아 문제지를 풀고 있다. 설날 당일 오후 한 시 서울 모처 아파트단지 스타벅스의 모습이다. 저 아이들은 지금 행복할까?

 

다 널 위해서 그런거야 라는 말에 결박당해 설빔 입고 떡국 먹고 윷을 놀다가 세뱃돈 받는 신나는 날의 행복의 희생하여 여기 나와 있다. 다 날 위해서, 내일의 행복을 위해서 그런 거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집 푸는 것은 적금과 다르다. 적금처럼 차곡차곡 문제집을 풀면서 오늘의 행복을 누리지 않고 쌓아 두면, 몇 년 뒤에 고율의 복리로 미래의 행복이란 것이 되어 내 행복 주머니가 채워지는 게 아니다. 설날에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서 성취를 느끼고 즐겁다면 모를까 아니라면 그냥 몇 번 없는 유년 청소년기의 설날을 갖다 버리는 일이다. 좋은 대학에 가려고 문제를 푸는 거라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 사람 숫자는 한정되어 있고 대부분 학생들은 소위 명문대로 진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명문대를 나왔다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다. 1등급 받고 명문대 가서 대기업 취직하고 악착같이 돈을 모아서 서울 변두리 아파트 전세금이라도 마련해 결혼하면 이제 애기 낳고 또 문제집을 풀게 한다. 오늘을 감사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자기가 그렇게 괴롭게 설날에 문제집 풀고서도 자식한테 추석에 문제를 풀게 한다.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라며 설날에도 문제집을 푸는게 도움이 된다는 사람은 매 순간 현재의 행복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찾아내기 마련이다. 사소하지만 무언가를 이룬다 하더라도, 아니면 행시 변호사시험 회계사시험에 합격한 순간에라도 그런 사람은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기에 지금 결혼하는 것은 방해가 된다거나 앞으로 결혼할 배우자나 태어날 아이도 아빠가 박사를 따고 논문도 여러 개 써서 안정된 직장을 구하는 걸 더 좋게 생각할 거라고 괴변 궤변을 뱉는다. 여기에 혹해서 넘어가면 예수님의 재림처럼 언제 올 지 모를 행복한 미래를 위해 지금의 행복은 영원히 제쳐두어서 불행의 쳇바퀴에 갇히게 된다.

 

그 날과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는 모른다. (마르코 13,32-3 참조)

 

그렇다고 명문대를 나오지 못하면 불행한가? 그것도 아니다. 사람의 취향과 가치관은 수만 가지고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살면 된다. 같이 살면서 최소한의 약속으로 서로 해를 끼치지 않고 살면 된다. 학창시절 공부를 잘 못하던 친구들도 다들 각자 잘 살고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사업에 성공해서 경제적으로 풍족하기도 하고 원하는 대로 목회자가 되어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다들 잘 산다. 서울에서 회사를 잘 다니다가 돌연 배우자와 함께 사직하더니 시골에 간 사람도 있다. 남들과 비교하는 게 잘못은 아니지만, 남들의 삶을 보는 이유는 혹시 그중에 내가 좋아하는 삶이 있을지 배움을 구하는 목적이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아무런 대중이 없으면서 남들의 좋은 것만 보면 영원히 불행하다. 그러면 회계사가 되어도 변호사를 부러워하고 변호사가 되어도 한의사를 부러워한다. 그렇게 비교하면 내게 없는 것만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도 모든 걸 다 가질 순 없다. 그래서 없는 것만 불평하여 영원히 불행하다.

 

한편, 다 널 위한거야 라고 말할 땐 적어도 상대가 좋아하는 게 뭔지 살펴서 그런 삶을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설날에 학원 보내고 문제집이나 풀게 하면서 널 위한 거야라고 말하는 건 양심이 없는 저질 말종의 짓거리다. 해줄 수 있는 것도 해준 것도 해주려고 고민해 본 적도 없으면서 자기 만족으로 아무런 성찰 없이 해놓고 남한테 감사를 바라는 개잡놈 심보일 뿐이다. 도시에서 강아지를 키우면서 강아지를 위해 짖지 못하게 성대를 떼고 꼬리를 자르고 거세까지 해놓고 그게 강아지를 위한 거라고 말하면 안 된다. '내가' '좁아터진 도시에서' '이 미물을 키우기 위해' 강아지의 몸에 칼을 대는 것이지. 무슨 일을 할 땐 자기가 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 양심적으로 직시해야 한다. 강아지를 거세하는 일은 강아지가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이다. 아이에게 설날에 문제집을 풀게 하는 것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이게 아이를 위한 일인가.

 

그동안 날 위한 거라고 말하며 무언가 하던 사람들에게 그렇게 받은 것을 갚아야 할지 고민이다. 아무 도움이 안 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100의 노력 중 실제 도움은 1-20 정도니 말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열심히 불경을 읽어주는 노력을 해놓고 그리스도인이 그 값을 치르길 바라면 심보가 틀려먹은게 아닐까? 원치 않는 호의를 베풀어 놓은 것이니 말이다.

 

원치 않는 호의와 무관심한 불간섭

 

가족과 친척이 무엇인지 회의가 드는 설날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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