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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연구자가 '자기에게 진실하다'라는 것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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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에게 진실되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이 왜 문제인가? 이는 항상 문제인가, 아니면 인문학의 경우에만 문제인가? 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어제 친구에게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있다고 하니 친구가 한마디를 던졌다. "인문학이 위기라고 떠들어대는 사람 치고 진단만 내리지 치료에 관심 있는 사람을 내가 본 적이 없어."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인문학이 몸뚱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고치겠는가? 그리고 위기라고 진단하고 떠드는 건 혼자서도 가능하지만 치료는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도 양심 있는 지성인이라면 뭔가 하기는 해야지 않을까? 난 그 방법은 인문학자들이 집단적으로 자기에게 진실한 삶을 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인문학이 하는 일이라곤 좋은 삶이 무엇인지 제시하는 것뿐이 없기 때문인데, 이는 말로만 떠들어서 전달될 일이 아니라서다.

 

추국 아성공 맹가

 

몇 달 전 나의 사랑하는 그녀에게 같이 성당에 다니자고 했다. 갑작스럽고 뜻밖이었겠지만 나의 사랑하는 그녀는 내가 성당을 가는걸 그렇게 좋아하니 우선 궁금해서 몇 번 같이 가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의 사랑하는 그녀가 일요일 아침 서울 반대편 구석의 성당에 왔다. 요셉 신부님은 그날 강론에서 유아세례를 받은 젊은 신자들이 점점 성당을 등지는게 교회의 큰 걱정이라고 했다. 일요일 오전에 일어나서 성당에 오기도 귀찮고 교리는 고리타분하고 미사는 따분하고 강론은 지루하고.. 이유야 많겠지만, 신부님이 강조하신 것은 어려서는 부모님이 가자고 해서 그냥 다녔지만 그동안 자녀들 눈에 부모가 성당을 다녀오고 행복해 보이지 않아서라는 것이었다. 자녀가 보기에 성당을 다녀오고 부모님이 행복하고 좋아 보이면 자녀도 자연히 성당으로 오게 되리라는 말이다. 자녀뿐만이 아니다. 나의 사랑하는 그녀도 성당에 첫 발을 들인 건 내가 성당에 가서 좋아 보였기 때문이라고 하니 말이다.

 

주희의 수양론을 왜 연구하는가? 격물치지가 무엇인지 말로 따져서 무엇하는가? 사단칠정이 어쩌고 부중절이니 이기호발이니 왜 핏대 세우며 논쟁하는가? 그런 '공부'법을 정밀히 검토하고 익혀서 내가 성인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사단은 순선하고 칠정은 순선하지 못하고 이는 스스로 발할 수 있는지 기와 섞이면 이미 순수하지 못한 것이 아닌지 따지는 게 판타지 소설의 설정 가지고 논쟁하는 것과 무슨 질적인 차이가 있는지 인문학 연구자들은 답할 수 있을까? 인문학을 아무리 연구한 교수라도 성정이 난폭하고 성미가 급하여 걸핏하면 화내고 갑질하고 산다면 그 교수는 스스로 자기가 연구한 바가 헛된 말장난 개념 끼워 맞추기 일 뿐 좋은 삶을 지향하는 것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교수는 자기의 주장을 자기 스스로는 진지하게 믿을까? 혹은 그냥 이 연구가 너무 재밌어서 그럴까? 그렇다면 나혼자 고상한 일 하고 있다거나 나는 너희들과 달라 하는 오만은 떨지 말아야 한다. 나도 그냥 재미로 한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대중이 자신의 연구를 알아보아 주지 않는 까닭은 무지하고 멍청해서가 아니다. 자기가 쓰는 글이 본질적 가치도 없고 나아가 그냥 해리포터보다 재미가 없어서이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교수에게 자신의 연구 주제는 그저 자기에게 사회적 지위를 주는 좋은 돈벌이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돈벌이 수단으로 치면 고상한 말장난보다 나은 수단이 많다. 인문학 연구자가 인문학의 본질적 가치, 즉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탐구하고 그 삶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를 모색하는 것을 외면하면, 돈벌이라는 도구적 가치로 봤을 때 인문학은 별다른 가치가 없다.

 

이런 점에서 인문학은 다른 학문과 다르다. 자기가 자기 주장이 정말 옳고 또 좋다고 믿지 않는다면, 인문학은 아무런 쓸모도 가치도 없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그 믿음은 자기가 제시하는 좋은 삶에 대한 비전을 행실로 드러내는 것으로밖에 입증되지 않는다. 그게 그렇게 좋은 삶이라면 왜 너는 그렇게 살지 않느냐? 우리 사회에서 여기에 먼저 실패한 곳이 바로 개신교의 목사다. 예수의 삶을 본받고 가르침을 실천하며 맡은 양떼를 이끌어야 할 목사들이 입으론 복음을 뱉지만 행태가 망나니였다. 복음이 아무리 옳고 좋아도 사람들은 목사의 행실과 교단의 타락과 부패를 보고 교회를 등지고 침뱉는다. 우리 사회의 지도층 중에 입바른 소리를 주구장창 하다가 본인의 삶은 실은 그 정반대였던 것을 들키고 조롱의 대상이 된 사람이 근래에 꽤 있다. 이들의 주장이 틀려서가 아니라, 이들이 말하는 옳고 좋다는 것이 사실은 이들도 따르지 않는 허울뿐인 옳고 좋은 것이었다는 생각에 사람들이 비웃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어떤 교수의 이론에 따르면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토론을 하면 이러이러한 가치가 함양되어 우리가 이러이러한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교수님의 행실을 보면 그 이론은 틀린 것 같다. 백날 그렇게 개념을 깎고 끼워 맞추어 논쟁해봤자 그냥 말장난일 뿐이이지 그런 덕목이 함양되지 않는다. 그런데 말장난이라고 한다면 논문보다 해리포터가 훨씬 재밌고 유익하다. 해리포터가 아니더라도 각자 취향에 맞는 넷플릭스 드라마나 유튜브 컨텐츠를 보는 것이 낫다. 자기도 믿지 않는 주장이나 이론을 남이 가치 있게 여겨줄 리가 없다. 사람들이 인문학에 등을 돌린 건 인문학자들이 자기에게 진실된 삶을 살지 않아서다.

 

인문학자가 완벽한 사람이기를 요구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런 사람은 있지도 않고 되기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연구하고 주장해온 바에 따라 먼저 자기를 성찰하고 잘못이 있으면 뉘우치고 고치려고 하는 태도를 바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가 아니다. 자기에게 진실된 삶을 살기 위해서 박사를 딸 정도로 연구를 할 필요도 없다. 중고등학교 도덕 윤리 정도의 지식에 그러한 덕목을 힘쓰려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중도하산을 하려고 한다.

 

子曰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논어 팔일편의 말씀이다. 사람이 어질지 않으면 예악은 해서 무엇하느냐?

마태오의 복음서 7장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온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진실되지 못한 말 뿐이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말씀이다.

 

나는 논어 맹자에 나오는 공자와 여러 제자, 맹자의 삶에서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진지한 믿음을 얻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내 삶의 태도의 지침으로 삼기로 했다. 유교는 위기지학, 즉 자기 자신을 위하는 배움이라고 한다. 배우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나의 삶을 좋은 삶으로 이끌기 위해서이다. 물론 배우면 부수적인 떡고물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떡고물을 받아먹고자 너무 많은 타협을 하고 싶지는 않다. 몸은 조금 힘들더라도 마음이 편한 길을 찾아 떠난다. 나에게 진실되지 못하여 입맛도 없고 가슴은 답답하며 숨도 잘 쉬어지지 않던 며칠이었다.

 

하산의 변이 이토록 길었다.

 

친구가 마련해준 골방 안식처에서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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