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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임금님과 병든 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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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어떤 책의 편집을 맡았다. 대부분 개인적으로 잘 아는 교수와 박사 열 세명의 글을 엮은 책이다. '대중'이라는 쉬운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병의 발병률이 특히 높은 집단에서 야심 차게 '대중서'로 기획했다. 기획 의도대로 쉽게 읽히는 글이 있는가 하면 누구의 글은 내가 배움이 짧아서인지 도무지 읽을 수가 없다. 내용은 둘째치고 무슨 말을 그렇게 새끼줄마냥 꼬아서 빙빙 두르는지. 좀 알아듣게 쓰라고 칼질을 많이 해서 보냈더니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답장을 보내려다 말았다. 대신 그 답장 내용을 다른 친구한테 보내 황당함을 토로했다.

벌거벗은 임금님 동화를 보면,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다. 오히려 금실 은실로 수놓은 옷이 아름답다고 칭송할 뿐이다. 어떤 아이가 나타나 의문을 표하기 전까지 모두 쉬쉬한다. 이건 그나마 다행인 상황이다. 더 심각한 경우는 모두 눈이 삐고 집단 환각에 빠져서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임금님이 금실 은실로 수놓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행진하고 있다.

학계를 보면 대중과 닿으려는 시도와 노력이 참 많다. 그 중에는 성공적인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런 책은 읽어보면 문외한 독자가 이해하게끔 얼마나 세심하고 친절하게 설명하고자 노력했는지가 보인다.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는 분야의 소중한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하려는 진심이 느껴진다. 하지만 아닌 경우가 훨씬 많다. 대중에게 다가가겠다고 해놓고 평소 방식대로 지껄이기 때문이다. 그래놓고 대중 탓을 한다. 책이 안 팔리는 이유는 대중이 무지하고, 중요한 문제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집단 자폐에 걸린 집단은 남의 주머니와 사회에 기생하지 않고 자립하거나 못하면 도태되는 게 옳다. 기생하는 주제에 거만하기까지 하면 눈꼴시려서 보기가 힘들다.

그 글을 대중서라고 내놓은 사람과 거기에 아무 말 안 하고 있는 주변이 처한 상황은 벌거벗은 임금님의 상황일까 그보다 심한 모두가 눈이 삔 상황일까. 그게 대중서면 내가 지금 끄적인 글은 한국연구재단우수학술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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