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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술랑을 생각하며 思元述郞

이렇게 지어 보았다 如是我習作

by 內幕 2022. 12. 4.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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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元述郞 원술랑을 생각하며

 

金冠英在鷄林枝 금관의 꽃봉오리 계림의 가지에 있구나

歲次八月想接隆 때는 팔월이니 접붙이면 활짝 꽃필텐데

雖然未霣誰稱花 스러지지 않으면 누가 꽃이라 부르리오

此夏石門吹朔風 올여름엔 석문에 삭풍이 부는구나

 

 

신라의 화랑 김원술은 김유신의 아들이다.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으로 이름은 김구해 혹은 김구형이라고 한다. 신라 법흥왕 19년인 532년 세 아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하고 진골로 신라 골품에 편입된다. 세 아들 중 막내 김무력은 화려한 군공을 세우며 신라 17관등의 최고위인 각간에 오를 정도로 승승장구하는데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원술의 증조할아버지가 되는 사람이다.

 

고조할아버지 김구형이 항복한지 어느덧 140년이 지난 672년은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무너뜨린 신라가 이제 한반도의 주도권을 두고 당나라와 전쟁을 벌이던 때였다. 김원술은 그해 8월 지금 황해도 모처에서 벌어진 석문전투에 하급장교로 참전했다가 당나라 군대에 패배하고 후퇴한다. 이에 아버지 김유신은 크게 노하여 문무왕에게 김원술을 죽여야 한다고 외쳤지만, 문무왕은 듣지 않고 김원술을 용서한다. 그래도 김유신은 김원술이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선언하고 쫓아낸다. 이듬해 김유신이 죽자 김원술은 어머니 지소부인을 찾아가지만 지소부인 역시 김원술을 내친다. 낙심한 김원술은 은둔하다가 나당전쟁이 종지부를 향해 가던 675년 다시 세상에 나와 매소성 전투에 참전하고 큰 공을 세운다. 그리곤 다시 어머니를 찾지만 어머니 지소부인은 끝내 김원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비관한 김원술은 결국 세상을 등져 이후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김유신과 지소부인의 혼인은 655년이며 슬하에 차남 김원술을 비롯한 5남 4녀를 두었다. 기록대로라면 석문전투가 벌어진 672년 차남 김원술의 나이는 많으면 열다섯 정도였던 것이다. 꽃(花郞)이라기엔 아직 덜 핀 꽃봉오리(英), 그마저도 승자의 나라에서 펴보려는 망국의 후손 김원술이었다. 수백 년 다퉈온 백제와 고구려를 도모하고 이제 당나라 군대만 한반도에서 몰아내면 드디어 통일이 완성된다. 동아시아의 패권국 당나라의 군대가 한반도를 휩쓸던 672년 8월의 여름은 신라라는 꽃나무에 이제 막 접붙은 가야의 꽃봉오리가 피어나기에 더없는 기회였다.

 

망국의 왕족이 새 나라에서 가문을 보전할 수 있는 길은 기성 귀족보다 더 열심히 나라에 헌신하는 것이다. 가야의 꽃봉오리가 신라의 가지에서 피기란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꽃다운 사내들 화랑. 왜 이름이 이토록 싱그럽고 풋풋한가. 계백이 이끄는 백제의 결사대에 맞선 열다섯 꽃다운 관창, 관창에 앞서 황산벌에 스러진 김유신의 조카 반굴, 그로부터 24년 뒤 보덕국의 난을 진압하다 전사한 반굴의 아들 영윤. 이 모두 꽃다운 나이에 전장에 스러진 화랑이었다. 바닥에 뿌려진 앳된 소년들의 서슬퍼런 피를 화랑이라 부른다.

 

삭풍은 겨울에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다. 그해 여름 석문에 불던 삭풍을 피해 달아난 김원술을 누가 화랑이라 불러주겠는가. 뒤늦게 매소성으로 돌아왔지만 꽃으로 피어나기엔 이미 늦으리.

 

자기 자신을 살기엔 주변이 허락치 않던 신라국 김원술을 생각하며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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