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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로 가는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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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명리학, 관상학, 풍수지리학이나 음양오행도 철학이라고 부르거나, 누군가의 관점, 사상, 비전, 입장 등도 그냥 큰 의미로서 예컨대 이승만의 철학, 김대중의 철학, 노무현의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희, 칸트, 헤겔이 한 것을 철학이라고 하고 그런 지적 활동을 업으로 하는 사람을 철학자라고 할 때, 철학자는 자폐가 되기 십상이다. 의학에서 말하는 병으로서 자폐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경험적으로 획득해야 할 지식과 연역적으로 획득해야 할 지식을 구분하지 못하고 모두 연역적으로만 획득하려고 하는 습관이, (외부에 대해) 스스로(自) 닫혀있다(閉)는 점에서 자폐라는 것이다.

경험적으로 획득해야 하는 지식은 예컨대 이렇다. "나는 세심하고 배려가 깊은 사람이다"라는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에 대한 지식은 경험적으로 획득해야만 한다. 세심하고 배려가 깊다는 것은 타인의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관심을 통해 타인이 현재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식별하여, 자신이 그것을 제공할 수 있는지 성찰한 뒤, 그것을 베푸는 행위까지 이루어질 때 세심하고 배려 깊게 된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 관찰과 그에 따른 행위가 실제로-즉 경험적으로- 타인의 필요와 결핍을 올바르게 식별했고 채워줬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남이 느끼기에 그래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위 명제의 진위를 따지는 정상적인 방법은 주변인에게 본인의 평판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는 사람마다 찾아가서 "내가 세심하고 배려가 깊어?" 하고 물으라는 게 아니다. 그렇게 묻고 다니는 사람은 (경험적으로 획득하려는 시도를 한다는 점에서 개선의 여지가 일말 보이기는 하지만) 이미 중증이다.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길은 내가 머저리같이 묻고 다니지 않아도 평소에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여 서로 그렇게 이야기하고 내게도 가끔 그런 칭찬을 해주어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결론에 연역적으로 도달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나는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할 것이기 때문에 나는 세심하고 배려깊은 사람이다'의 형태가 된다. 이때는 심지어 주어진 상황마저 가설적이다. 이처럼 경험적으로 판단해야 할 문제를 연역적으로 판단하게 되면 나는 예수도 될 수 있다. 나는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질 수 있는 (가설적) 상황에서 (역시 가설적으로) 십자가를 질 것이므로 나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다. 나는 아무런 경험적으로 드러나는 일 없이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스스로가 세심하고 배려깊다고 연역적으로 결론 내리는 사람은 대개 남에게(외부 경험세계에) 관심이 적거나 제대로 된 관심을 기울일 줄도 모르고, 그래서 남이 필요로 하지 않거나 원치 않는 것을 베풀고 스스로 만족해한다. 내가 "배려 없는 호의"라고 부르는 상황을 일으키는 것이다 (배려 없는 호의의 부작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하겠다). 주변 사람은 그가 왜 스스로를 세심하고 배려깊다고 평가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고 납득도 잘 되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본인의 자기완결적 세계에서 명백히 세심하고 배려가 깊은 사람인 자신을 남들이 그렇게 여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의아하다.

경험적으로 획득해야 하는 지식은 아주 많다. 다른 예로, "우리 아들이 왜 박사를 그만두려고 할까?" 알고 싶을 수 있다. 이 경우에는 그냥 아들에게 왜 그런지 물어보면 된다. 물론 아들의 답변이 편향되거나 진상의 일부만 전하는 상황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고려는 어쨌든 외부로부터의 정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보정이다. 아들에게 묻지도 않으면 그 결론은 그냥 망상이다. 지도교수도 훌륭하고 장학금도 학업을 마치기에 넉넉한데 그만두는 이유는 분명히 누가 꼬드기고 부추겨서야! 그러면 범인은 아무개나 아무개겠지. 이런 못된 아무개!라고 하는 게 망상이다.

물론 개인이 주어진 상황에서 필요한 경험적 정보를 모두 얻기란 불가능하고 머릿속에서 천하대계를 논하기는 쉬우므로 이렇게 망상하는 것은 큰 잘못도 아니고 또 흔한 일이다. 그런데 내가 자폐라고 하는 단계는 이런 결론에 대한 집착 정도에서 보통 사람과 다르다. 보통 사람은 저 결론을 ‘추정’으로 받아들인다. 추정이란 확실하지 않은 사실을 그 반대 증거가 제시되기 전까지 진실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기회가 되어 물어봤는데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면 생각을 고친다. 아주 정상이다. 자폐의 단계는 본인의 결론을 추정이 아니라 간주로 여긴다. 간주는 반대 증거가 나타나더라도 결론이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최근 미국 어느 명문대 교수가 저명한 학술지에 논문을 냈다. 요지는 유교 고전에서 여성은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양육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유교 국가에서 근본적인 의례(ritual)인 제사의 참여자로 그려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적이고 집안일(domestic)의 영역과 공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이 나뉜다는 이분법은 유교 고전이 제시하는 철학적 비전에 잘 들어맞지 않으며, 여성 역시 유교정치적인 역할을 맡았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도 자폐다. 논문의 저자는 실제 동아시아 전통시대 유교국가에서 지낸 제사에서 여성의 역할이 어땠고 오늘날 정치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영역에서 여성은 배제되었다는 사실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이 논문에 대해서도 다른 글에서 말하겠다).

시대가 변해도 어느 나라는 불변의 절대악, 어느 나라는 핍박받은 우리 민족이라는 역사관을 고수하는 집단도 자폐다. 물론 이들이 철학자라는 것은 아니다. 철학을 하기엔 정신역량이 부족하고 단지 별생각 없이도 되뇌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선악 이분법을 고수하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과거 습득한 정보가 잘못이고 낡았다는 점을 거부하고 새로운 정보도 거부한다는 점에서 자폐라는 건 어쩔 수 없다.

다양한 사례의 공통점은, 이들이 경험세계에 관심이 부족하고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집도 세다. 외부환경이 바뀌는 것에 따라 생각이나 신념이 바뀌지도 않기 때문이다. 철학적 자폐의 경우 불확실하고 오염된 경험보다 순수하고 깔끔한 내 생각이 더 가치 있고 중요하다. Doxa가 아니라 Idea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남들이 뭐라건 실제가 어떻건 자기완결적인 세계 내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된 결론을 고수한다. 자폐로 가는 경로는 다양하지만 철학은 그중에 자폐로 가기 쉬운 활동이다. 철학은 외부와 교류하는 활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이란 진리와 거기에 도달하려는 나 사이의 일이다.

철학자는 자기완결적인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을 고수한다. 철학자인 나는 고독하다. 중증 철학형 자폐로 가면 남들은 나를 이해해주지 못한다. 그들은 나를 핍박한다. 나는 박해받고 있다.

"내 생각에"가 아니라 외부의 경험세계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나를 무조건적으로 아끼고 사랑해주는 부모 이외에 나를 이해하고 나와 함께하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지 여부, 즉 제대로 된 연애 경험이 있었는지 여부는 아마도 철학형 자폐 판별의 중요한 기준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철학을 하지 말고 사랑을 하라.

철학형 자폐는 남 얘기가 아니다. 내 투병기이자 같은 병실에 있던 환우들의 관찰기이다. 예방법은 이렇다. 철학이 업이라면 철학 말고도 할 줄 아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 50분 철학 하면 10분은 외부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좋다. 그리고 철학은 나와 진리의 관계일 뿐이므로 되도록 외부를 접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에는 철학을 내려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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