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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논란을 지켜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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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면 내 의견에는 홍범도가 육군사관학교에서 특별히 기려야 할 위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흉상을 모셨으면 옮기지 말아야 한다. 이런 결론에 이르기까지 내가 고려한 점은 다음과 같다. 

  1. 육사에서 기려야 할 위인의 덕목
  2. 과거 인물을 평가할 때 적절한 기준
  3. 퇴거해야 할 만한 사유

육사에 있는 홍범도의 흉상. 묘사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좀 더 잘 만들지 그랬나 하는 느낌이 든다.


먼저 육군사관학교는 어떤 덕목이나 자질을 갖춘 위인을 기려야 할까? 육사는 고급지휘관이 될 군인을 양성하는 국가기관이다. 따라서 군인과 지휘관의 덕목을 갖춘 이를 기리는 것이 마땅하다. 나는 지휘관의 첫 번째 덕목은 전략수립과 실행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전투에서도 승리하고 전쟁도 승리하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혹은 전투에 패하더라도 전쟁은 승리로 이끌 줄 알아야 한다. 난 이 점에서 홍범도가 특별히 출중한 지휘관임을 입증하진 못했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역량이 모자라 서라기보다도 독립군은 개별 전투 수행을 넘어서 전쟁을 수행할 정도의 규모가 되지 못했고, 여러 전투도 학자들이 밝힌 바에 따르면 대첩이라고 불릴 만한 것은 없다. 청산리나 봉오동 전투도 열악한 비정규군이 근대화된 일본제국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서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정도였다고 본다. 이것도 민족사적 의미가 크다고 할 순 있지만 그것과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을 증명하는 것은 별개다. 이 점에서 홍범도는 예선을 통과하지 못한다. 독립군 출신으로 한국전쟁에서 뛰어난 지략과 전술을 뽐낸 군인이 여럿 있는데, 아쉽게도 홍범도는 19세기 중반에 태어난 인물로 나름 천수를 누렸지만 광복도 보지 못하고 작고했다. 어찌 보면 전술적 역량을 증명할 기회가 없었던 인물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또 군인이다보니 전술역량 외에도 필수적인 덕목이 있다. 나는 그게 사내다운 호방한 기개와 꺾이지 않는 의지, 국가에 헌신하는 충성심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본선이라고 할 것인데, 홍범도는 본선은 넉넉히 통과한다.

예선을 거쳐 후보가 되고 본선을 통해 확정되는 절차를 따른다고 할 때, 논란 없이 모셔도 될 인물은 하늘이 내신 충무공 정도가 있을 것이다. 지략과 인품이 살다 간 모든 사람 중에 단연 빼어나신 영웅이다. 예선을 통과할 인물로 백선엽이 있다. 본선을 통과할지는.. 홍범도는 지난 정권에서 특별전형으로 예선을 생략한 것 같기도 하다.

홍범도의 러시아 입국서류. 직업은 의병, 사회상의 지위는 농사라고 적었다. 목적과 희망에 고려독립이라 적은 호방함이 보인다.


둘째로 과거 인물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어떤 태도로서 해야 하는가도 고려했다. 홍범도의 소련행과 공산당 행적이 논란의 일부를 점하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 이에 대한 뚜렷한 의견이 있다. 나는 ‘우리에게는 당연하지만 당시로선 명백하지 않은 것’을 두고 과거의 인물이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비상한 판단력과 정세를 읽는 안목으로 확신에 차서 오늘날 우리가 정답이라고 여기는 판단을 한 인물도 더러 있다. 그런 사람이 대단한 것이지 그 사람과 같은 판단을 내리지 못한 사람이 비난받을게 아니다. 당시 접할 수 있는 정보나 지식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나는 홍범도가 공산당에 가입한게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잘못도 아닐게 아니라 나는 홍범도는 근대교육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무학자기에,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라는 공산주의의 표어 이상으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냥 소련이 민족자결주의로 우리의 독립을 지원해 줄 것 같으니까 공산당에 가입한 것이라 생각한다. 독립을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은 사람들을 멍청하다거나 빨갱이라고 해야 할까? 잡은 동아줄이 썩었는지 아닌지 따질 겨를도 없는데 말이다. 그렇게 낙인을 찍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세종대왕도 반민주주의적인 전제군주며 부인 외에 후궁도 여럿을 둔 남성우월주의자라고 굳이 말하는 건 철학적 자폐 성향일 뿐이다. 홍범도에게는 어떤 점에서 공산주의가 허황된 지, 소련이 어떻게 뒤통수를 치는지 등을 알 단서가 적었다. 말하자면 홍범도는 공산주의 확신범이 아니다.  게다가 공산주의가 우리 민족에 해악을 끼치기 이전에 별세했으니 실제로 홍범도가 공산주의자가 됨으로써 우리(=한민족 혹은 대한민국)에 끼친 해악은 없다.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것은 우리 민족에게 끼친 해악이기는 하나 본인도 피해자고, 공산주의보다는 스탈린이라는 반인륜 독재자의 패악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본다) 이 점에서 독립운동 출신 공산주의자로 함께 언급되는 김원봉하고는 다르다.

김원봉은 확신범 공산주의자며 북한 정권 수립에도 참여하고 숙청되기 이전까지 기습 남침인 한국전쟁을 포함하여 북한 정계의 고위인사로 활동했다. 대한민국과 우리민족은 동일하지 않다. 우리 민족은 19세기 후반부터 열강에게 국권을 위협받다가 1910년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민족 해방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 대한민국의 역적일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광복에 헌신한 것을 기리는 일은 민족적 관점에서 합당하지만, 그들이 우리 민족의 정통이자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인 신생국 대한민국을 선택하지 않은 과오를 저지른 것을 망각해서도 안 된다. 홍범도의 행적을 볼 때 아마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을 선택하지 않는 죄를 지었을 것이지만, 본인의 명예 측면에서나 우리가 그를 거리낌 없이 기릴 수 있다는 측면에서 모두 다행이게도 그런 과오를 저지르기 전에 별세했다. 마치 일제가 1945년에 패망함으로써 더 큰 반민족행위를 하지 못한 사람들처럼 말이다. 1920년대 생에 이런 운이 따른 경우가 많다. 얼마 부역하기 전에 일제가 패망하여 더 큰 죄인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미 모셨다면 철거하거나 옮김으로써, 또는 그런 논의를 하면서 선열을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조선시대의 경우 왕이 아닌 개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은 문묘에 모셔지는 것이었다. 문묘는 성균관과 각지 향교에 있는 공자의 사당인데, 공자와 공자의 도통을 잇는 안자, 자사, 증자, 맹자 및 다른 유교 성현을 모신다. 한국의 문묘에는 설총, 최치원, 안향이 모셔진 채로 조선이 열렸고, 초기부터 새로운 인물을 배향하자는 논의가 꾸준히 벌어진 가운데 조선이 망할 때까지 기존 3인에 15인이 더해져 총 18인의 동방현인이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중 이황과 이언적, 이이와 성혼이 각각 배향 전후 배향에 관한 시비가 치열했고, 이이와 성혼은 실제로 출향되었다가 재배향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문묘에 모실지 논의가 되는 사람은 실제로 모셔지지 않았더라도 모두 훌륭하고 모범이 된 인물들이다. 그렇기에 논의 과정에서 결격사유를 지적할 때에도 선현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러나 당파가 논의에 끼게 되면서, 선현에 대한 모욕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황과 이언적이 '간신이 득세할 때 벼슬하던 인물'이라거나, 유학자에게는 최고의 모독처럼 여겨지는 '노장(老莊)'의 혐의 혹은 불교에 빠졌던 인물이라거나, 제 한 몸 살겠다고 임진왜란 때 임금의 호출을 묵살했다거나. 이런 발언이 나오자 자중하는 토론자들은, 당파가 다르더라도 모두 훌륭한 인물이라는 것을 재차 환기했다. 또한 논의되는 인물들은 서로를 깊이 존경했는데 그 제자된 사람들이 당파심에 상대의 스승을 모욕하는 일은 그릇되다고 지적했다.

홍범도 논란을 지켜보며 내가 걱정스러운 점은 이거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도 않고 말하기는 쉽다. 이는 철학적 자폐증의 한 증상일지도 모른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평생 앞만 보고 달리며 헌신한 사람을 두고, 그 긴급하고 급박한 상황에서 잠시 멈춰서 주위를 둘러봤으면 그런 선택을 안했을텐데 하며 방구석에서 스스로를 추켜세운다. 홍범도가 흠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홍범도가 내린 판단이 아쉽거나 의아한 경우가 있다. 그리고 홍범도가 자유민주적 가치를 몸소 실천하는 모범적 인격의 소유자일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우리 모두 만큼이나 홍범도도 사람이다. 선열이 무결한 사람이라고 신화화, 신성화할 필요도 없지만 반대로 당파심이 앞서 몇몇 선열을 매도하기로 답을 내려놓고 그 근거를 찾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쉽사리 별 것 아닌 사람으로, 혹은 더 나아가 나쁜 사람으로 치부해 버릴 만큼 홍범도의 흠이 크다고 할 수 있을까? 육사에 모시는 것은 알맞지 않다는 의견을 가지더라도, 그것이 홍범도가 잘못을 저지르고 못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홍범도라는 영웅이 단지 육사라는 기관의 역할과 상징에 들어맞지 않을 뿐이기 때문이라는 정도에서 그쳐야 한다. 검게 칠한다고 가려질 빛이 아니다. 홍범도 흉상을 육사에서 치워버려야 할만큼 홍범도의 흠이 크지 않다면, 이미 모신 분을 괜히 욕되게 하지 말고 그냥 모시는게 옳지 않은가. 홍범도뿐 아니라 우리가 가볍게 입에 올리는 영웅들 모두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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