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혹은 빈곤이라느니 쇠퇴라느니 하는 말은 국물로 따지면 이제 우리고 우려서 사골이 형체도 남지 않았을 그런 상투적인 말이다. 그만큼 내로라하는 석학, 대중강연자 펜대나 마이크 좀 쥐어봤다는 사람들치고 여기에 대해 한마디 근엄한 통찰을 던져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겠다. 조금 헝클어진 머리에 넥타이를 매고서 '물 위를 걷기 위해선 빠지기 전에 재빠르게 다음 발을 내딛으면 된다'같은 리빙포인트 해법을 대단한 통찰이랍시고 던지면 그동안 흘린 먹물의 양에 비례하는 강연료가 통장에 꽂힌다. 명강연이라며 쏟아지는 박수갈채는 덤으로 말이다. 인문학이 위기에 빠져버려 훌륭한 학자들이 팔 걷고 나서 목에 핏대를 세운 지 오랜데 인문학이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병든 인문학에 달라붙은 의사들이 알고 보니 가짜 학자, 전문가들이었던 것이 아니라면 왜 인문학은 늘 빈사상태일까? 이미 인문학 덕분에 정년을 보장받은 교수들 말고도, 물질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고기 한 점은커녕 말라비트러진 뼉다귀만도 못한 인문학에 삶을 바치는 배고픈 대학원생도 허다한데 말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인문학이 무엇인지 조금 정리를 해두어야 하겠다. 내가 정의한 것이 인문학이라기 보다도, 그렇게라도 먼저 정리를 해야 쓰는 나도, 내 공상속의 독자도 아무래도 덜 헷갈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름지기 펜대를 진지하게 휘두를 때에는 자기가 듣고 알고 생각하는 내에서 휘둘러야 한다. 나는 인문학 중에서도 일부만 다루어봤고, 내가 보고 아는 만큼만 자유롭게 말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틀린 내용도 있을 수 있고 전혀 동의가 안 되는 말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반박시 님말이 맞는 것을 우선 엄숙히 인정하는 바이다.
난 인문학을 크게 두 의미로 사용한다. 첫째는 큰 의미에서의 인문학이다. 인문학이란 말은 수많은 주제와 질문과 범위를 망라하는 아주 큰 용어로 쓰이지만 (그래서 사실 별다른 의미가 없이 쓰이기도 하지만), 이 모든 분야가 '인문학'이라고 불릴 수 있게 하는 관통하는 질문있다고 생각한다. 그 질문이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이며, 이와 관련된 질문을 하고 답을 추구하는 진지한 시도를 인문학이라고 부르겠다. 둘째는 고등교육기관의 학문분과에 따른 분류로서의 인문학이다. 이에 따르면 흔히 문사철을 인문학이라고 부른다. (물론 철학의 근본 질문은 더 이상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다.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이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가 근본 문제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게도 그럴까? 이는 '철학하기'의 의미를 엄격하게 사용하는 한 친구와의 오랜 대화를 가지고 다음에 다루겠다.)
내 인문학적 배경을 대학이라는 고등교육기관의 학제분류에 따라 설명하자면, 나는 서울 모처의 대학에서 학부는 정치학과 역사학, 같은 곳에서 석사로 정치학(정치사상)을 전공했고, 현재 다른 곳에서 정치학(정치이론) 박사과정을 다니다가 그만두려는 중이다. 다룬 내용으로 하자면, 학부에서 정치학은 주로 사상 수업을 들었고 역사학은 한국사 전반을 위주로 했다. 학부를 다니던 중 한국고등교육재단의 한학연수장학생에 선발되어 3년간 유교 고전을 강독했다. 물론 학부 수준이니 지식에 큰 깊이는 없지만 그래도 몇몇 수업에서 고민한 것들은 아직도 내 삶의 진지한 물음이다. 석사 때는 민족주의, 유교헌정주의, 대표제(representation)를 공부했는데 졸업논문은 유교헌정주의로 썼다. 이 논문을 쓰는 데에는 어려서부터 회초리의 가학(加虐이 아니라 家學이다)으로 익힌 유교 고전과 학부 시절 사학과 수업에서 얻은 역사적 소양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외 인문학적 배경으로는 그리스도교가 있다. 석사를 졸업한 이후에 갑자기 성경을 읽기 시작했는데 구약의 모세오경과 역사서는 이야기가 너무 재밌었고 신약의 복음서에서 예수가 너무 멋있었기에, 결국 교리반을 다니며 세례를 받게 되었다. 정리하자면 내 인문학적 배경은 크게는 선진 유교고전, 성리학, 한국사와 중국사, 학부 수준보다는 조금 높기를 희망하는 서양철학, 그리스도교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모든 것은 처음에는 우연히 접하게 된 것이 많지만, 결국에는 내가 좋아서 했다는 것이다. 다른 것들도 우연히 혹은 내가 의도를 가지고 접해본 것이 많지만, 결국 내가 좋아하지 않아서 더 추구하지 않았다. 예컨대 인류학, 사회학, 경제학, 심리학이 그랬다. 내가 인문학이라고 말할 때 가리키는 대상은 이상에서 내가 공부했거나 전공은 아니지만 큰 관심과 애정으로 그쪽 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켜본 분야다.
그러면 뭐가 위기라는 말일까? 돈이 안된다, 배워도 취직을 못한다, 뭐 여러가지 위기에 처한 것은 맞다. 그런데 그걸 다 알고도 호기롭게 인문학 대학원에 원서를 던지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의 물질적 사정은 적어도 BK, HK, SSK 등 한국연구재단 연구 사업이 생긴 뒤로는 나아졌다. 나만 하더라도 BK와 SSK가 없었으면 석사 생활이 훨씬 궁핍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인문학이 점점 더 위기라고 하는 거 보니, 적어도 대학원생 숫자가 줄어들고 인문학의 대가 끊기게 생긴 지경을 위기라고 하지는 않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인문학이 위기라고 한다면, 다른 제반 조건보다도 인문학이 존재해야 할 이유를 인문학을 파는 사람들이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하고 그걸 듣고 앉아있는 양반들도 납득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위기라고 불러야 한다. 이는 아주 근본적인 문제다. 누가 왜 공학이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간편하게 생각해서 집도 짓고 도로도 깔고 다리도 놓고 해야 하니까(건축공학), 반도체, 컴퓨터, 스마트폰을 만들어야 하니까(전자공학) 등 답할 수 있다. 다른 학문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다. '~~학'이면 그냥 '~~'가 필요하니까! 라고 답하면 되고 (혹은 조금 더 자세하게 '~~학'의 근본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게 필요하니까!) 그러면 사람들은 대부분 납득할 것이다. 인문학은 '좋은 삶이란 무엇이며 이는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있어서, 그래서 그 존재 이유에 대한 의문이 거듭 커지다가 지금 지경에 이르렀는가? 내 생각에는 아니다.
다시 돌아와서, 인문학은 왜 위기일까? 돌아오자마자 옛날 이야기로 다시 빠져야겠다. 학부 때 나는 순전히 친구가 '야 들어보자'라는 한심한 이유로 인류학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볼륨이 넘치는 파마에 맵시 있는 자켓과 스커트, 블라우스, 브로치를 늘 하고 다니는 딱 봐도 세련되어 보이는 교수가 하는 수업이었다. 내용은 주로 아프리카 누어인(Nuer)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들의 삶이 얼마나 자연과 공존 가능하며 이들의 결혼제도가 얼마나 우리와 다른지 등.. 조금 나쁘게 말하면 오리엔탈리즘적인 환상 투영이었다. 물론 누어인의 삶을 어떻게 묘사하고 기술할 것인지는 크게 보면 개인의 자유며 좁게 봐도 학문적 자유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바는, 누어인의 삶이 그렇게 좋은 삶이라면, 그렇게 좋다고 말하는 댁은 왜 그렇게 살고 있지 않느냐, 혹은 적어도 그렇게 살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누어인의 삶을 닮는다는 것이 기계문명을 포기하고 가죽이나 풀잎, 거적으로 옷을 만들고, 움막을 짓고 살아야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쩌면 누어인의 삶의 모습이 그렇게 되도록 이끄는 어떤 정신이 있을지도 모른다. 자연을 대하는 태도 등. 그런 정신을 배우고 함양하더라도 지금 누어인처럼 살 필요는 딱히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헐리우드의 로맨스 코메디에 나오는 멋진 커리어우먼 같은 행색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 누어인의 삶을 침이 마르도록 칭송한다면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저토록 누어인의 삶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저렇게 살지 않는 걸 보니, 누어인의 삶이 별로 좋은 게 아닌가보다. 내 생각에 인문학이 위기인 이유는 인문학(관련)자들이 자기에게 진실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진실되다는 것은 무엇인가? 위에서 내가 욕보인 인류학자의 예를 다시 활용하자면, 이분은 자기의 삶과 자기가 말하는 좋은 삶이 동떨어졌다. 물론 좋은 삶의 모습이 한 두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보기엔 다른 사람이 말하는 좋은 삶이 '나쁜 삶'일 수도 있다. 예컨대 여성해방운동을 하는 사람이 보기에 현모양처인 여성은 얼마나 세뇌받고 억압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겠는가? 좋은 삶이 무엇인지 서로 다른 관점에 서 있는 사람끼리 이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딱히 없다. 그리고 다원주의 사회에서 좋은 삶에 대한 관점이 다르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될 점은 하나도 없다. 문제는 여성해방운동을 하는 사람이 현모양처의 삶을 살면서 그 삶의 방식에서 커다란 행복을 느끼고 있을 때 생긴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자기에게 진실되지 못하다"고.
자기에게 진실되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이 왜 문제인가? 이는 항상 문제인가, 아니면 인문학의 경우에만 문제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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