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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도움이 될거야 - 무슨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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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글빙글 돌고 도는 지구에 살면서 세상 둥글게 지내면 좋으련만, 들으면 대부분의 경우 내가 모나게 굴게 되는, 그래서 나는 역으로 아주 신중하게만 사용하는 낱말이 있다. 바로 책임도움이다. 다 그렇게 된 까닭이 있다.

우선 책임은 남탓 하고 싶지 않아서 남에게 책임이라는 말을 잘 꺼내지 않는다. 뼛속 깊이 새겨진 노예도덕에 비추어 성찰해 보면 내가 당당하게 타인에게 '책임을 지라'고 말할 수 있는 사안은 극히 드물다. 내 일상에 벌어지는 대부분 사건은 나의 선택이 결과의 원인에 큰 몫을 차지한다. 나의 선택과 무관한 요인도 늘 없지 않겠지만, 이 경우 역시 내가 조금 더 성실하게 살폈더라면,, 껄껄껄 껄무새 신공에 의해 큰 부분이 파훼된다. 그래서 아주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있는 인과관계가 보이는 경우가 아니면 막연히 누군가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태도가 패배자, 루저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많은 경우 자신의 공을 과대평가하며 타인의 성취를 환경이나 여건, 운으로 돌린다. 책임에 대해서는 언제 기회가 있길 바라고, 오늘은 도움을 말해보려 한다.

도움이라는 말을 잘 꺼내지 않는 이유도 비슷하게 시작한다. 내가 몇 마디 해준 것, 내가 막연히 방향을 제시한 것, 내가 별 일 아니지만 해준 것을 가지고 내가 남에게 도움이 되었다거나 말하기 민망하기 때문이다. 그가 잘된 것은 그가 올바른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한 조언이 그에게 큰 울림이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을 수도 있다. 혹은 나의 존재 자체에서, 나의 선택과 행적을 지켜보면서 무언가 느낀 경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가 내게 깊이 고마워하고 나를 좋아할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에도 나는 내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에게 도움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내가 그를 도운 것은 아니다. 노량 바다에서 충무공이 눈먼 탄환(流彈)에 맞고 쓰러지신 것처럼, 일종의 눈먼 도움이었던 셈이다. 내 헝클어지고 성긴 말들에서 무언가 깨닫고 올바른 방향으로 선택을 하게 된 그가 credit을 가져감이 마땅하다. 물론 그가 고마움을 느끼고 그렇게 느낌으로 인하여 우리의 관계가 보다 돈독해지는 것을 꺼리지는 않는다. 나도 이런 류의 도움을 받은 바가 더러 있다. 필요한 시기에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 내 주변에 있고 내가 그를 관찰하여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은 큰 운이다. 나는 내게 그런 도움을 (도움이라기보다는 쓰다 보니 '선한 영향력'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이기도 한다) 준 사람에게 호감을 갖고 감사를 표하며 보답하고자 마음을 쓴다.

약 일 년 반 전쯤, 이제는 중국의 지방도시가 되어버린 곳에서 마음이 크게 괴롭던 시절, 두 사람이 '도움'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어차피 이 글을 볼 일도 없으니 그냥 별명으로 바로 부르겠다. 한 사람은 합크고 다른 사람은 뚜얏이다. 이 둘을 언급하는 이유는, '도움'이라는 낱말을 사람들이 어떻게 사용하는지 이 둘의 용례가 명쾌한 예시로 보이기 때문이다. 합크는 내가 합당하게 책임과 도움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방식으로 도움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합크는 몹시 합리적(rational)이다. '무엇을 어떻게 하면 어디에 어떤 도움이 된다'의 구조로 발화한다. 목적합리성을 염두에 두고 합크의 말을 들으면 합크는 달성가능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를 위한 단계적 계획수립하며, 이행을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그가 세운 계획이 목표달성을 위해 아주 효율적이고 적합함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가 나에게 진정한 애정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한 것인지 그 의도에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가 제시한 계획을 택하여 내가 계획을 이행하고자 심혈을 기울였다면, 그렇게 얻은 결과에 대해 나는 합크가 상당한 credit을 내세울 수 있다고 인정했을 것이다. 방향 없이 열심히만 해서는 답이 없는데, 그가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단계를 이행해 감에 있어 매 순간 그의 지도가 필요하다) 따라서 내가 이 분야에서 성취한 바가 있다면, 나는 합크의 도움이 컸다고 말했을 것이다.

뚜얏은 다르다. 뚜얏의 도움은 '다 큰 도움이 될 거에요'의 도움이다. 뚜얏은 칸쇼에게 자신을 위해 무상으로 노무를 제공하라고 요구하지만, 이는 무상이 아니다. 이때의 경험은 장래에 다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는 오히려 그러한 경험을 제공하는 시혜를 베푸는 것이다. 난 이게 도움이라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뚜얏의 의도조차 도움을 주려기 보다는 부려먹으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뚜얏과 칸쇼가 일종의 장인(匠人)과 도제(徒弟) 관계이기는 하지만, 뚜얏이 칸쇼에게 요구하는 노무의 내용은 둘의 장인-도제관계에서 장인이 도제에게 비법을 전수하기 위한 훈련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따르는 노무가 아니다. 단순한 허드렛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뚜얏처럼 교활한 의도를 가지고 도움이라는 낱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좋은 의도를 가지고서도 저렇게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최근에 서로 다른 일로 '도움'이라는 말을 두 번 듣고 기분이 몹시 상한 일이 있었다. 첫 번째 일은 내가 박사를 다시 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가 박사학위가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헷지(hedge)'로서도 도움이 되며, (부친이 만세를 부를 것이기 때문에) 나와 내 부친 사이의 관계개선에도 도움이 되리라고 한 것이었다. 그리고 박사가 내게 두 방향 모두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하자, 내가 "큰 그림에 대해서는 무감"하며, "박사를 함으로 인해서 얻게 되는 기회와 안정감이 가정에도 다 도움이 되"리라고 반박하는 것이었다. (나의 갑작스런 전향의 이유로 아들이 태어나고 맘이 바뀌었다는 둥 이유를 대라고 하는 등 황당하고 주제넘는 말도 더러 했지만, 여기서는 '도움'이라는 주제에 한정하여 말하겠다)

(내 억단이 아님을 확인하기 위하여 글을 쓰다가 부친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이제 와서 곧 박사를 다시 하려고 한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냐고 물었다. 내가 학문적 업적을 남기길 아직 기대하기는 하고, 그래서 박사를 다시 한다고 하면 환영한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나는 재능이 있기 때문에 연구를 하면 업적을 남기긴 할 것이되 그건 닭 잡는 업적이라고 했다. 나는 소 잡는 칼이기 때문에 소 잡는 업적을 남길 것이고 닭 잡는 일에 칼 휘두르는 낭비는 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관계 개선에 대해서는 현재 딱히 나쁠 게 없기 때문에 개선될 점이랄 게 있는지 모르겠고, 귀국 후 가정을 이루고 손자를 안겨 준 것, 그리고 더 안겨줄 생각이 있다고 하는 것만 해도 황송하고 감사하다고 한다. 내 억단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셈인데, 어쨌든 내게 박사를 다시 하라고 본인 스스로가 권할 생각은 일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내게 가정은 나와 나의 사랑하는 그녀와 우리 아들이기에, 가정에 도움이 될지 여부도 나의 사랑하는 그녀에게 의견을 물었다. 나의 사랑하는 그녀는 박사 학위가 어떤 기회든 주기는 하겠지만, 내가 정말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즉 학위로 인해 얻는 나의 만족감이 가정에도 간접적으로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면- 학위 자체가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지금 나는 학위 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에 어떤 이유에서건 싫어하는 일을 해야 한다면 가정에는 해가 된다고 한다)

두 번째 사건은 최근 어떤 부동산 사건으로 인하여 재판에 출석해야 하는 일에 관해서였다. 재판 준비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가까운 관계에 있는 고위 법관의 자문을 구해서 했다. 그분은 우리의 구술을 듣고 사건의 쟁점은 무엇이며, 상대방의 주장을 파훼할 몇 가지 논리와 해당 판례를 알려주셨다. 그리고 재판 절차상 우리가 취해야 하는 행동과 재판장에서 주의해야 할 점 등을 일러주셨다. 재판 당일은 회사에 어떤 행사가 있는 날이었는데, 나는 재판에 출석하기 위하여 그날 휴가를 써야만 했다. 보통 휴가 사유를 굳이 밝히지 않는데 그날은 행사가 있는 날이었기 때문에 회사 동료들에게 사유를 적당히 밝혔다. 그러자 그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다른 특정 직장 동료에게 사유를 더 구체적으로 밝히라고 권했다. 그 다른 동료분은 부동산에 빠삭한 분이고 이번 사건도 부동산 관련이기 때문에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나는 그 다른 분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기에 거절했다. 사건이 정리되면 어떤 일이었는지 말씀드리겠지만, 재판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는 말씀드리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재차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 동료분이 아는 사람이 있어서 도와줄 수도 있다고 말했으나, 재판이 일주일 열흘 앞으로 다가왔고 이미 답변서도 제출한 마당에 무슨 도움이 있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왜 이렇게 없을 거라고 단정하냐고 역정을 냈다.

어쨌든 당시에 나는 결국 합크의 도움을 거절했다. 그 이유는 나 자신을 성찰한 결과, 그가 제공하는 기회와 도움이 내가 원하는 것도, 내게 필요한 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회란 그 기회를 취했을 때가 취하지 않았을 때에 비하여 나음이 있어야 한다. 고등학교 때 이 아무개 도덕선생님은 이런 비유를 자주 들었는데, 길 가다가 10만 원을 보면 빌게이츠가 그걸 줍는 건 시간낭비지만 자기는 달려가서 주울 것이라는 것이다. 내가 연구자의 길이 맞지 않는다고 느낀 시점에서부터, 그가 제공하는 모든 것은 기회도 도움도 아니게 된다. 마치 채식주의자에게 '어디로 가면 맛있는 고기를 먹을 기회가 있어요'라고 할 때 이를 기회라 부르는 것이 무용하고 도움이 되지도 않는 것처럼 말이다. 막연히 말하는 것을 허용하자면, 군대에서 부조리를 겪은 것도 다 도움이 된다. 그런 도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군대를 가야 한다고 말할까?

막연히, 장기적으로, 장차, 장래에라는 말로 아무리 분식한들 이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선택과 집중의 능력이 부족하고 목적합리성을 결여했음을 보여주는 것 외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 "In the long run, we all are dead." 막연히 말하기로 하면,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 이는 당장의 도움이 되는 말만 도움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장래에 도움이 될 것이지만, 그 시기가 대략 언제쯤이며, 어떤 인과관계로 인하여 무슨 도움이 될지 정도는 도움을 준다고 말하는 사람(도움공여호소인)이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에게 제시할 의무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도움은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이 원하는 도움이라는 점도 함께 밝혀야 한다. 그 정도도 없이 도움공여호소를 하는 것이라면, 개똥도 언젠간 약으로 쓸 수 있으니 집안에 쟁여두라는 말뿐이 더 되겠는가?


도움에 대해 이렇게 입장 차이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된 이후, 나는 그간의 그의 행보를 회고해 보았다. 최근 서너 달 동안 나는 그의 판단력, 목적합리성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타당한 수단과 방법을 택하는지-에 상당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목적과 합리 둘 다를 의심한다. 여기에 이런 회고를 더하니 나는 막연히 도움을 말하는 사람들이 선택과 집중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어디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따지지 않는 까닭은, 선택과 집중을 하지 못해서이다.

여러 가지 방향 중 내가 바라는 것, 원하는 것을 선택하여 목표를 구체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 방향으로나 가는 것도 다 '가는 것'으로 보인다. 어디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언젠가는 도움이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집중하지 못한다. 힘과 시간은 -즉, 자원은- 무한이 아닌데, 모든 게 다 도움이 되는 것처럼 느껴지니 주어진 자원을 집중하여 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고 그중에 선택이 필요하다. 한 사람이 모든 걸 다 이룰 순 없고 자원도 유한하기 때문이다. 어느 나이 대에 이르러서도 아직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사람도 있고, 큰 목표에 도달하여 성취가 있는 사람도 있고, 방향을 틀어서 다른 길을 가는 사람도 있다. 꽤 늦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들이 방향을 잡고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방향이 없는 경우가 문제인 것이다. '열심히 하고 있다'고 위로해도 이는 자위일 뿐이다. 겨냥하지 않고 쏘는 화살이 맞을 리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어딜 겨냥하지 않고 쏘았는데 화살이 이 어디에라도 '맞았다(적중)'고 할 수나 있을까? 방향 없는 노력을 하다가 힘이 빠지면, 주둥이 풀린 풍선이 갈팡질팡 하다가 공기가 빠지고 어딘지 모를 곳에 떨어지는 듯 될까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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